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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주의, 포스트구조주의, 그리고 반항

부조리주의, 포스트구조주의, 그리고 반항

왜 살아야 하는가? 왜 살아가야만 하는가?

더 많은 돈, 더 넓은 집, 더 높은 자리, 더 좋은차를 위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간다. 나는 진정 더 많은 돈, 더 넓은집, 더 높은 자리들을 원하는 걸까? 아니면 사회 구조가 주입한 것들을 욕망하는걸까?

연봉이 1억까지는 선형적으로 행복도가 상승하지만, 그 이상부터는 행복이 포화되는 그래프를 본적이 있다. 살아가기 위해서 돈이 없다면 불행하겠지만, 돈의 총량만큼 선형적으로 행복도가 증가하는것은 아니다. 시간은 유한한데, 더 많은돈, 더 높은자리등등만을 생각하느라, 정작 열심히 살긴 하지만, 행복하진 않았던 경험이 있다. 100억이있으면 좋은집, 좋은차등을 살 수 있겠지만, 행복할까? 아니면 그뿐일까

내게 필요한 몇가지의 필수조건들만 충족된다면, 그 이상의 돈은 행복과 사실 큰 연관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나는 왜살아야 하는가? 사회에서 주입한 더 많은돈, 더 큰차, 더 넓은집들을 욕망해봤자, 선형적으로 행복도는 증가하지 않는다. 행복하기위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더이상 자본은 해답을 주지 못한다.

카뮈의 부조리주의

카뮈는 세상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주장한다. 이성적인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는 인간의 열렬한 욕망과 대비되게, 세계는 아무런 의미나 목적도 제공하지 않는다. 나는 게임을 해도, 비싼옷을 사도, 여행을 가도, 그냥 그뿐인듯 하고,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을 해왔다. 카뮈에 의하면 세상 자체는 부조리 하기때문에, 어차피 세계는 어떠한 삶의 의미나 목적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에 반항을 하라고 말한다. 물리적 자살이나, 철학적 자살의 잘못된 경로로 가는것이 아니라, 반항을 통해 자유와 열정을 다해 살아가라고 말한다.

물리적 자살은 말그대로 자살하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삶 자체를 포기하는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조리를 해결하는것이 아닌, 도피이자 패배이다.

철학적 자살은 부조리를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종교나 특정 이념에 귀의하여 절대적 의미가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이 역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맹목적인 희망으로 도피하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사형집행 직전 자신을 회개시키려는 신부를 거부하는 장면이 이 철학적 자살을 거부하는 태도이다.

부조리에 대한 반항은 세상에 내재된 의미가 없음을 인정하고, 신이나, 희망에 기대지도 않으며, 죽음이라는 한계를 명확히 의식하는것이다. 부조리를 똑바로 마주한 채 주어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 속에서 자유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말한다.

반항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우선 첫번째로 자유를 위해서 신, 운명, 사후세계, 절대적 도덕과 같은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 영원을 기대하지 않기에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유일하게 중요해진다. 따라서 내일이나 다음 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을 위해 현재를 선택할 자유를 얻는다. 두번째로 열정을 위해서 삶이 유한하고, 한번뿐이며, 의미가 없다는것을 알기에, 유한한 삶을 최대한 열정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마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햇빛의 뜨거움때문에 방아쇠를 당기고, 마리의 피부와 드레스를 느끼듯이 관념이 아닌 현재 삶 자체를 열정적으로 느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것은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해야한다. 이를 Consciousness로 강조한다.

카뮈는 실존주의철학을 주장한 사르트르와 비교되는데,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고 주장하며, 인간은 우선 실존하기 때문에, 그 본질(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가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카뮈는 의미를 만들어가는것 조차 불가능하다고 본다. 의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중요한것은 의미를 찾는것이 아니라, 부조리함을 의식하고, 그에 굴하지 않고, 자유와 열정을 가지고 살아내는 태도 그자체를 중요하다고 본다.

이방인의 부조리주의 철학은 시지프신화에서 자세히 설명되는데, 시지프 신화에서 처럼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부조리한상황을 ‘인식’하고, 그것을 반항으로 대하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카뮈이후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

카뮈 이후 구조주의가 등장한다. 구조주의는 나라는 개인의 의식이나 자유가 아니라 개인의 생각을 규정하는 구조가 존재한다고 본다. 예시로 언어라는 구조를 통해 인간은 생각할수 밖에 없고, 결국 생각이라는것은 구조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개인도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카뮈가 말한 완전한 자유는 허상이 된다.

구조주의 이후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를 더 해체하여, 하나의 거대하고 안정된 구조가 아니라, 유동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의 힘에 개인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계몽주의의 거대 담론 자체가 사실은 억압의 도구였다고 주장한다.

카뮈가 개인의 이름으로 무의미한 세계에 반항했다면, 그 이후의 철학은 개인마저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것임을 폭로하고, 그 구조마저 권력의 산물임을 해체한다. 그 결과 진짜 의미가 사라진 시대를 맞았다.

포스트 구조주의자 푸코는 권력의 바깥은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자유롭다고 느끼는 감정, 열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대상마저도 사회 구조가 권장하거나, 허용한것일 수 있다. 따라서 완전한 자유라는 허상을 버리고, 구조에서의 틈새와 균열을 찾는 실천적 자유를 추구해야한다. 카뮈의 반항이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것이라면, 푸코의 자유는 구조에 갇힌 나 자신을 자각하고, 대신 그 사이의 틈새와 균열을 찾는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그러면 살아가면서 어떻게 사회에 반항해야할까? 우선 세상의 부조리함을 인식한다. 그 다음 이 구조가 나에게 무엇을 정상이라고 강요하는지 의식한다. 그 이후 두번째로 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진리들에 대해 질문한다. 더 큰집, 더 많은 돈, 비싼 차등등을 추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진정 그것들이 지속되는 행복을 가져다 주는것일까? 스타벅스 커피보다 커피머신으로 뽑아먹는 300원짜리 커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이런질문들을 통해 사회가 당연하다고 주입한것들을 다시한번 반추해보아야 한다.

세번째로 나를 재구성해야한다. 권력이 나를 A라고 규정한다면 나를 B, C, D로 살아보는 실험을 하는것이다. 푸코는 Care of the self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권력이 나를 멋대로 주체로 만들려 할때, 오히려 내가 나를 돌보고 나를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즉 이전에 주체적인 태도로 질문을 해나간것들을 바탕으로, 나 자신을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 나는 세상이 부조리하다는것을 인식하고, 나의 반항은 사회의 부조리를 의식한체, 저들이 정해준 열정이 아닌 나만의 열정을 찾고, 저들이 허락한 자유가 아닌 나만의 틈새를 만들어 부조리한 삶을 나의 작품으로 살아낼 수 있다.

etc그냥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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